1.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川澤)·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요, 대다수 민중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일년내 소득으로 일신(一身)과 처자의 호구 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치어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끝내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이 해마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여 딸각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배고픈 귀신이 아니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 - 학교로 보내고, 조선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소전오존의 형제" 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라 한 일본놈들 적은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일본화(半日本化)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염세절망의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 채우기, 단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 매는, 콧구멍에는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사전에도 없는 가진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옥문에서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질자가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하며, 진취 활발의 기상은 경우(境遇)의 압박에서 소멸되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채찍질·구박·압제를 받아 환해 삼천리가 일개 대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로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 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草芥)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의 의병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의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거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욕보인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일신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보존〉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 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인민 생명·재산·자유 보호" "조선인민 행복증진" 등을 거듭 밝힌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2천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제를 못 보느냐?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한 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이에 부화뇌동하는 자가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


설혹 강도 일본이 과연 관대한 도량이 있어 개연히 이러한 요구를 허락한다 하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일반의 배고픈 귀신이 될 뿐이 아니냐? 참정권을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 개 노예 대의사(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아사의 화를 면하겠는가?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어떤 종류의 자치임을 묻지 않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간판인 〈제국〉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그 지배하에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헛된 이름으로써 민족적 생존을 유지하겠는가 ?


설혹 강도 일본이 불보살(佛菩薩)이 되어 하루 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환부하며, 내정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헛된 이름의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한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쇄망한 인도족·유태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하나는 금전의 힘으로 그 조상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하나는 그 토지의 넓음과 인구의 많음으로 상고(上古)에 자유롭게 발달한 문명의 남은 혜택을 지킴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 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람의 피를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 데서 문화를 발전 혹 지켰던 전례가 있더냐?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어 대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의거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3. 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1은 외교론이니, 이조 5백년 문약정치(文弱政治)가 외교로써 호국의 좋은 계책으로 삼아 더욱 그 말세에 대단히 심하여 갑신(甲申)이래 유신당(維新黨)·수구당(守舊黨)의 성쇠가 거의 외원의 도움의 유무에서 판결되며,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갑국을 끌어당겨 을국을 제압함에 불과하였고, 그 믿고 의지하는 습성이 일반 정치사회에 전염되어 즉 갑오·갑신 양 전역에 일본이 수십만 명의 생명과 수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노 양국을 물리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하는 이들은 일검일탄으로 어리석고 용렬하며 탐욕스런 관리나 국적에게 던지지 목하고, 탄원서나 열국공관(列國公館)에 던지며, 청원서 나 일본정부에 보내어 국세(國勢)의 외롭고 약함을 애소(哀訴)하여 국가 존망·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병〉 - 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 천년만에 처음 당하던 치욕에 대한 조선민족의 분노적 표시가 겨우 하얼빈의 총, 종로의 칼, 산림유생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 십년 역사야말로 용기 있는 자로 보면 침을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어진 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러고도 국망 이후 해외로 나가는 모모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전쟁(日美戰爭)·일로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의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사조약의 당시에 열국공관에 빗발돋듯 하던 종이쪽지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년의 헤이그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메,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전쟁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써 전쟁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에 성패를 생각지 않고 의병을 모집하여 아관대의로 지휘의 대장이 되며, 사냥 포수의 총든 무리를 몰아가지고 조일전쟁(朝日戰爭)의 전투선에 나섰지만 신문 쪽이나 본 이들 - 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리할 용기가 아니 난다. 이에 "금일 금시로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장관이나 사졸감까지라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감각되어, 그 준비론의 범위가 전쟁 이외까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 겠다, 상공업도 발전해야 겠다, 기타 무엇 무엇 일체가 모두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다. 경술 이후 각 지사들이 혹 서·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혹 시베리아의 찬 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돌아가며, 혹 경향(京鄕)에 출몰하여 십여 년 내외 각지에서 목이 터질 만치 준비! 준비!를 불렀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이 없는 단체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의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4.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 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 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는가?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 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 〈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을 양세력 곧 신·구 양 상전의 누가 더 어질며, 누가 더 포악하며, 누가 더 선하며, 누가 더 악한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할 뿐이요, 직접의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목을 베어 백성을 위로한다"가 혁명의 유일한 취지가 되고 "한 도시락의 밥과 한 종지의 장으로써 임금의 군대를 맞아 들인다"가 혁명사의 유일미담이 되었거니와,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 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팽창의 열도가 숫자상 강약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해진 판단에서 이탈하여 돈 없고 군대 없는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들도 쫓아내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는가?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 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다.


일반 민중이 배고픔, 추위, 피곤, 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 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여 뭇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일로가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활잔포한 강도 일본이 필경 쫓겨 나가는 날이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폭탄을 한번 던진 것만 못하며 억천장 신문 잡지가 일회 폭동만 못할 지니라.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궐 안 한 때의 활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분격하여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언뜻 보였지만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폭력〉 양자의 그 하나만 빠지면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를 내며 장열한 거동이라도 또한 번개같이 수그러지는도다.


조선 안에 강도 일본이 제조한 혁명 원인이 산같이 쌓였다.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개시되어 "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리라", "일본을 쫓아내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구호를 가지 고 계속 전진하면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지니, 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후면에는 어두운 함정이요, 나아가면 그 전면에는 광명한 활기이니, 우리 조선민족은 그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암살· 파괴 ·폭동--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정탐꾼·매국적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할 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



5.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 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제1은, 이족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민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족 전제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적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족통치를 파괴함이니라.


제2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적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적 조선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함이니라.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을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 약탈제도를 파괴함이니라.


제4는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 위에 강자가 있고 천한 자 위에 귀한 자가 있어 모든 불평등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박탈, 서로 질투·원수시하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민중을 해치다가 말경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해치어 민중 전체의 행복이 필경 숫자상의 공(空)이 되고 말 뿐이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함이니라.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전통적 문화사상의 종교·윤리·문학·미술·풍속·습관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이바지하던 도구가 아니더냐? 일반 민중을 노예화하게 했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 계급은 강자가 되고 다수 민중은 도리어 약자가 되어 불의의 압제를 반항치 못함은 전혀 노예적 문화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니, 만일 민중적 문화를 제창하여 그 속박의 철쇄를 끊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은 권리 사상이 박약하며 자유 향상의 흥미가 결핍하여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할 뿐이다. 그러므로 민중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함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新朝鮮)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1923년 1월


의열단義烈團

Posted by 잡동산이(雜同散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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罪人多黙等 涕泣呼 干 本主敎大爺閣(閤)下 客春行人利旋 伏聞氣 候萬安 日月馳  歲色垂暮 伏未審  內更若何 伏惟賴 主洪恩 神形兼佑 德化日隆 望風馳慕 不勝 賀 罪人等罪惡深重 上干主怒 才智淺短 下失人謨 以致窘難大起 禍廷神父 而罪人等又不能臨危捨生 偕師報主 復何面目 濡筆而仰訴乎 第伏念 聖敎有顚覆之危 生民罹溺亡之苦 而慈父已失 攀號莫逮 人昆四散 商辦無人 惟我大爺 恩兼父母 義重司牧 必能憐我救我 疾痛之極 我將呼誰 玆敢 奏窘難顚末 而 釀已久 端緖頗多 一筆難述 故具在左方 伏望哀憐而照察焉 方今敎務 板蕩無餘 惟獨罪人倖免 若望不露 或者 主恩未絶於東國歟 嗚呼死者旣損生以 敎 生者當致死以衛道 然才微力薄 不知攸爲 密與二三敎友 商量目下事宜 披腹條奏 伏望 閱覽之餘 哀比 獨 速施拯救 罪人等如群羊之走散 或奔竄山谷 或棲遑道路 莫不飮泣呑聲 酸心通骨 而晝宵盼望者 惟上主全能 大爺洪慈 伏望誠求主佑 大施憐憫 拯我等於水火之中 措我等於 席之上如今 聖敎已遍天下 萬國之人 無不歌詠聖德 鼓舞神化 而顧此左海蒼生 孰非上主赤子 地方避僻 聞敎 晩 氣質孱弱 耐苦狼難 而十載風波 長在淚泣憂愁之中 今年殘害 更出夢寐思想之外 哀我人斯 胡至此極耶 此難之後 無特恩 耶蘇聖名 將永絶於東土 言念及此 肝 裂 中西敎友先生們 聽此危苦之情 寧無惻然傷心乎 敢望敷奏敎皇 布告各邦 苟可以救援吾 者 靡不用極 吾主博愛之恩 顯聖敎同仁之義 以副此切望之誠 罪人等 心揮涕 哭訴衷情 引領翹足 專候福音 惟我大爺 千萬可憐我 書不盡意 自乙卯失捕後 先王疑 日深 潛譏密察 未嘗少間 而終不知神父 跡 乃使趙和鎭者 假托奉敎 探之湖中(忠淸道之別名)事情 遂有己未冬淸州之窘 湖中熱心敎友死亡 盡 崔多黙必恭者 中路人也 性直志毅 仗義疎財 熱心 盛 有卓 不 之風 辛亥之窘 不幸被誘背敎 先王甚喜之 爲之娶妻拜官 多黙不得已順受 近年家居 深痛往失 常思損軀補贖 己未八月 先王忽然招致刑曹 問 尙奉邪學否 多黙適中所願 自分必死 遂直陳聖敎忠孝之理 自己痛悔之情 所言光明俊偉 感動旁聽 而刑官駭憤殊甚 據辭上聞 先王不復加刑 困循放釋 臺臣抗疏請誅 亦 糊賜批 頗示包容之意 事遂寢 李瑪爾定中培者 少論一名也(士夫妾子孫謂之一名) 居京畿道驪州 勇力絶倫 志氣豪快 素與金健淳爲生死之交 及健淳奉敎 瑪爾定亦信從領洗 熱心如火 明目張 而行 不 人知覺 庚申復活占禮 煮狗 酒 與同里敎友 會坐路邊(山僻小路) 高聲念喜樂經 擊匏樽按節 歌竟飮酒嚼肉 飮訖復歌 如是終日 未幾爲仇家所告 與同友十一人 被捕到官 友中亦有弱者 皆賴瑪爾定鼓動勸勉之力 屢經毒刑 一幷堅固 遂拘囚不放 瑪爾定本來 知醫術 而不甚精工 入獄後 或有問疾者 則先求主佑 後施鍼藥 莫不 愈 從此聲名大播 遠近輻輳 獄門如市 本官不能禁 自己有病 還來問藥 因此獄中日用不  金健淳嘗言 人或問瑪爾定療病之能  名稱之太籍 答以爲十之八九 然其實十之十 百之百 無一不效 獄吏求見醫方 答曰我無方書 只是恭敬天主 汝欲學醫 亦當信主 吏曰書冊已盡燒  從何而學 瑪爾定笑曰 吾胸中不 之書 猶足以誨人奉敎 同囚之元若望 有一老婢 常來須視 陳說家中情景 反覇誘說 若望不爲動 有一次語甚酸切 若望有戚戚之意 瑪爾定 視之 老婢   不敢畢其說而退 後遂不往曰 李生員眼光可畏 不能復往矣 獄中常 書念經 講道勸人 獄卒一人 動心信從 亦爲熱心之人 權哲身者南人(卽東人) 大家之裔 居京畿道楊根郡 素以經禮之學 爲世名儒 聖敎到東 全家信從 本係名家  謗亦甚 其弟日身 死於辛亥之窘 自此以後 不敢顯然守誠 而仇嫉者之憎恨愈深 己未夏本鄕怪鬼輩  誣告官 權家子弟 亦爲對卞 事將張大 賴本官明良 調停解釋 惡謨不遂 詭計愈秘 締結京中惡官 庚申五月 面奏先王曰 楊根一鄕 邪學熾盛 無人不學 無村不爲 而本官恬然 不加査察 該郡守合當警責 先王可其奏 楊根守引咎自退 新官到任 舊案復起 逮捕多人 而哲身則年老 怯 上京姑避 官將其子代囚之 其子屢請代受父罰 而本官不許 必欲招致哲身 事久不決 先王雖甚疑  然每事本不欲張大 且鐸德之事 關係兩國 萬一顯著 則處置極難 故乙卯後 群臣多請嚴禁聖敎 而一幷委之於有司 若不欲干涉者然 外鄕窘難 莫非暗命 而佯若不知 盖欲緩敎友之心 潛捕神父 暗地結果 計未成 而遽 落 金汝三者 本係湖中人 弟兄三人 皆領聖洗 爲避窘難 移居都下 近年汝三冷淡背敎 交結匪類 兩兄不能禁 有李安正者 亦係湖中人居京者  有家産而 爲汝三之姻親 汝三貧寒 常望其週給 而安正不能稱其意 因而結恨 尋常切齒 時安正恒受聖事 汝三 知之 妄以爲若神父勸他施財 則他不敢不從 而因神父不勸 故他不施財 遷怒於神父 生謀害之心 遂將神父之事 密告於捕盜部將 部將輩廉察五六年 終不能得 及聞此言 如何不喜歡

許以事成 則當薦汝爲厚祿之任 究問此人 方在何處 時神父住葛隆巴家 汝三亦能猜測 遂與部將約曰 某日 來我家 我當告之 約日未到 汝三適往他人家 忽然得疾不能還 約日部將到家空還 幸有一敎友 探知此事 告于神父 神父避往別所 命李安正備錢數十貫 往見和解之 汝三恨怒暫緩 不多日 國王棄世 各司多事 事得不起 然汝三旣有密告之後 亦不能自己 常與惡輩 綢繆謀議 必欲肆毒而後已 本國士大夫 二百年來 分黨各立 有南人 老論 少論 少北 四色之目 先王末年 南人又分而爲二 一邊則李家煥丁若鏞李承薰洪樂敏等若干人 皆從前信主 偸生背敎之人 外雖毒害聖敎 中心尙有死信 而同黨鮮少 勢甚孤危 一邊則洪義浩睦萬中等 眞心害敎之人 十年以來 兩邊結怨甚深 老論又分而爲二 曰時派 皆承順上意 爲先王心腹之臣 曰僻派 皆力守黨論 抗拒上意 與時派如仇讐 而黨衆勢大 先王畏之 近年擧國而聽之 李家煥文章盖世 丁若鏞才機過人 乙卯以前 先王寵任之 乙卯後 漸見疎棄 然此二人爲僻派之所深忌 必欲中害 家煥等雖背敎害敎 僻派諸人 常指斥爲邪黨  駁備至 先王每掩護之 僻派不得肆害 及先王薨 嗣君幼  大王大妃金氏 垂簾聽政 大王大妃 卽先王之繼祖母 本係僻派中人 本家曾爲先王所廢 因此積年懷恨 而莫能泄 意外臨朝 遂挾僻派而肆毒 庚申十一月 先王葬禮 過 卽將一班時派 盡行放逐 朝內半空 從前害敎之惡黨 素與僻派相連 見時勢大變 譁然 起 有大擧之勢 庚申四月 明會報名之後 諸友勸於神工 會外之人 亦從風而動 皆以化人爲務 秋冬之間 蒸蒸向化 日甚一日 而婦女居其二 愚鹵賤人居其一 士夫男子   世禍 信從者狼少 乙卯窘難 葛隆巴有保護之大功 而才能出衆 故神父專任之 葛隆巴亦熱心料理 化人甚衆 仕宦家婦女 入敎者頗多 盖國法若非逆賊 刑不及於士族婦女 因此他們不以禁令爲慮 神父亦欲籍此爲廣揚之根基 待之特厚 敎中大勢 都歸女友 然聲聞緣此亦廣 聖敎爲國家之一大政 新君卽位之後 明知必有一番處分 而不知處分之如何 神父愈加謹愼敎友咸懷憂  十二月十七日 刑曹發差 捕崔多黙拘因 而此人則去年獄案 尙在未決 此番被捕 不是意外 且其時不過自此申禁 朝廷則未有嚴敎 故敎友們 雖爲戒嚴 不甚驚  十九日聖獻堂占禮日曉頭 崔多黙之從弟崔伯多祿 在臨街藥 閣子裡 與數人念公經 窓外適有投錢禁亂一輩 (投錢雜技名無賴輩以此賭錢故法司常有禁令) 聞窓裡 心聲 以爲投錢拍節聲 排窓躍入 不見投錢 搜各人身邊 獲一占禮單 而伊等不識字 不知爲何物 遂持去以示識字之吏 知係聖敎文字 復回來捉人 時天已大明 他敎友已盡走散 惟伯多祿 及吳斯德望兩人 被捕入官 與多黙同囚 於是捕盜部將輩 挾金汝三及都下無賴輩 以爲耳目 到處  採訪 敎中洶洶擾亂 値歲暮 事得暫緩 正月初九日 總會長崔若望被捕 自後部將輩 晝夜旁午 處處緝拿 被捕者塡滿兩廳 (捕盜廳有左右兩廳) 而率皆愚鹵新進 及閭巷婦女 剛毅者狼少 十一日 大王大妃下敎嚴禁  曰 先王每謂正學明 則邪學自熄 今聞邪學依舊 自京至于畿湖 日漸熾盛 豈不凜然寒心乎 京中及外鄕 修明五家統之法 統內若有爲之者 統首告官懲治 然猶不悛 當論以逆律  殄滅之  無遺種 於是各處騷擾 禍炎愈熾 敎友們 尤無所措手足 明會長鄭奧斯定 若鏞之第三兄也 先居楊根 庚申五月之窘 率家上京 本來 謗甚盛 庚申夏 有一惡官 指名請誅於先王面前 賴先王叱止之 至是見時勢已變 火色漸熾 自己恐不得免 取所有聖物書冊 及神父手札 貯之一籠 寄在他家 未幾寄籠之家 又有駭機 將欲搬回本家 而恐爲部將輩所獲 使任多黙者 扮作賣柴的 裡籠以枯松葉 十九日夕陽時 從街上負來 籠大薪薄不類樵擔 漢城府別肉禁亂見之 疑其爲私屠牛肉(私屠之禁絶嚴)  迫到官 開看都是聖敎書像 及神父筆札 府官大駭 遂將籠與人 押送捕廳 是如火上添油 禍難因此而大 書籠被捉後 敎友們莫不震驚 恐不保朝夕 過了十餘日 寂無動靜 二月初 捕盜大將李儒慶移職 新官申大顯視事 盡放滿獄背敎之人 惟崔多黙兄弟 崔若望 任多黙不放 或云將欲杖殺 或云方議遠竄 外間緝捕暫停 敎友們喜出望外 庶乎其無事 時有少北朴長卨 老論李書九 南人崔顯重 相繼上疏 極 聖敎 請以逆律論罪 幷論申大顯輕治之罪 大妃震怒 繫大顯于吏 移捕廳所囚四人于禁府 國法朝士及逆賊 禁府治之 捕廳專管盜賊 庶民有罪 刑曹治之 敎友皆庶民 而屬之捕廳者 用治盜律也 移之禁府者 論以逆律也 二月初九日 下李家煥 丁若鏞李承薰洪樂敏于禁府 十一日 捕權哲身丁若鐘 一邊申飭捕廳 從前放送之人 盡行追捕  將驪州楊根所囚諸人 解赴禁府 京鄕知名之敎友 無一人得免 道路上 邏卒橫馳 晝夜不絶 禁府及兩捕廳及刑曹獄 皆塡塞不能容云矣 二十四日 葛隆巴全家被捕 此後 士族婦女被捕者甚多 而皆不得詳聞 鄭奧斯定到官 官問書籠來歷 奧斯定認爲己物 官將籠中書札 遂一究問 奧斯定緘口不答 官送人問于家屬曰 汝夫汝父 只告神父之姓名居住 則必無死理 而甘受毒杖 終不開口  等家屬 應必知之  等須念家長之性命 從實直告 家屬俱以不知答之 於是公卿會義 論以大逆不道 二十六日 奧斯定及崔若望 崔多黙 洪方濟各沙勿  洪樂敏 李承薰 共六人一幷斬決 此後又有九人斬決 而女子三人 一則葛隆巴 其二不知 男子六人 亦不知爲誰 似是崔伯多祿等 而傳聞未詳 不敢强定耳 驪州楊根所囚諸人 皆還送本邑斬決 而未及査實 不能條奏 總會長崔若望昌賢 中路人也 乙卯致命崔瑪弟亞之族姪 家傳眞實之訓 聖敎到東 首先進敎 平和謹愼 公明精勤 二十年如一日 表樣純粹 言辭簡當 人或 疑 或遇患 心甚憂悶 一見其面 則自覺所遭之不大不難 更聞數言 則胸次釋然 講道詳明有味 雖談說天然 不圖悅聽 而人皆樂聞 不知厭倦 入人 深 聽之者大有神益 順命謙遜 出於自然 旣無卓異之表 亦無瑕 之行 德望爲敎中第一人 人無不愛信 家在笠井洞 故敎中號爲冠泉 趙和鎭之廉聞湖中也 已知崔冠泉爲敎中領袖 但不知其名與居住 故不能捕獲 至是見窘難將大 避住敎友家 辛酉正月初五日 體氣不平 不得已還家調攝 初九日夜半 金汝三導捕盜部將 到家掩捕 囚之捕盜廳 十餘日後 受治盜棍十三度 杖時屛氣伏地 如死人一樣 杖後 官數罪 蹶然而起 講明聖敎十誡 官曰汝旣孝敬父母 胡不行祭 答曰請審思之 就寢之時 雖有旨味 必不能嘗  已死之人 安能享飮食乎 官不能答 遂命下獄 自後無所聞 與丁奧斯定 同日被斬 時年四十三歲 丁奧斯定若鐘 性直而志專 詳密過人 嘗有學仙長生之志 誤信天地改闢之說 歎曰 天地 改時 神仙亦不免消融 終非長生之道 不足學也 及聞聖敎 篤信而力行之 辛亥之窘 兄弟親友 少有全者 而獨不撓動 拙於俗論 而 喜講論道理 雖當疾病飢乏之時 若不知其苦者然 或不明一端道理 則寢食無味 全心全力而思之 必至融通而後已 雖在馬上舟中 總不斷黙想之工 見有愚蒙者 盡力訓誨之 至於舌疲喉痛 而少無厭倦之意 雖甚愚鹵者 鮮有不明 嘗爲敎中愚者 以東國諺文 述主敎要旨二券 博採聖敎諸書 參以己見 務極明白 愚婦幼童 亦能開卷了然 無一疑晦處 緊於本國 更勝於   神父准行之 積年宿學 習與性成 每見交友 寒暄之外 卽陳講論 終日   無暇旁及他談 或得自己所未通者一二端 則滿心歡喜 積讚不已 或有冷淡糊塗者 不肯聽講 則不勝缺然悶然之意 人問各端道理 如探囊取物 不煩思索而滔滔不竭 反覆辦難 未嘗少窮 所言皆排比次序 無或錯亂 而精奇超妙 詳細的確 固人之信 熾人之愛 雖德望不及冠泉 明理過之 又以爲天主諸德 及各種道理 本來浩汗 而散在諸書 無一全論 讀之者難於領會 將欲 集各書 分門別類 彙爲一部 名曰聖敎全書 以贈後學 起草未半 而被難不能成 被捕入獄 官以王命責問 奧斯定直陳聖敎眞實之理 明其不當禁之意 官大怒以爲辦駁王命 論以大逆不道 出獄上車 將就法場 卽高聲謂人曰  等勿笑吾  人生於世 爲天主死 卽當行之事耳 大審判時 吾 之涕泣  而爲眞樂  等之喜笑  而爲眞痛  等必勿相笑 臨刑顧謂觀者曰  等勿  此時當行之事  等必毋   此後效而行之 一斫之後 頭頸半截 蹶然起坐 大開手畵聖號 從容復伏 與崔多黙同斬 時年四十二歲 崔多黙年老多病 獄中久已委頓 登車不省人事 將近法場 始顯歡容 首先被斬 時年五十六歲 洪沙勿 敎萬 權哲身之母舅 居京畿道抱川縣 少登進士 晩好經學 權家奉敎他亦信從 絶意仕宦 勸化鄕隣 爲一鄕領袖 其女適奧斯定之子 因此素有 謗 至是被捕致命 洪保祿樂敏 本係忠淸道禮山縣人也 少中進士 移居都下 與李承薰丁若鏞等爲友 甲辰乙巳之間 信從聖敎 以熱心明理幹事見稱 而爲遮人耳目 不絶科擧 己酉年登及第 屢官至司諫院正言 辛亥之窘 先王迫令背敎 頗有壞表 同時背敎者 皆全不守規 李保祿則不廢經齋 乙卯行聖事時 受補禮 預備解罪 未及辦工而窘難大起 名在韓永益告 中 又被先王逼迫背敎 自後在家則全守規誠 出外則隨順壞俗 己未遭母喪 亦不拜牌 年來熱心稍蘇 將欲全心歸主 善志未成 而被捕同斬 獄情嚴秘 不能詳知 而以意席之 則此人罪名 本來不大 若到官背敎 未必就死 而至於斬首 則可知其不悖聖敎矣 李承薰伯多祿 李家煥之甥姪 丁奧斯定之妹兄 少登進士 素好學問窮理 布衣李蘗大奇之 時李蘗密看聖書 而承薰不知 癸卯隨父入燕 李蘗密托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 子往見之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則西士必大愛之 多得奇物玩好 必勿空還 承薰如其言 到堂請洗 諸位司鐸 以其不明要理 不許領洗 惟梁神父力主授洗 幷給許多聖書 承薰到家 與李蘗等潛心看書 始通眞理 因而勸化親友 一時名士 從者甚多 推承薰爲首 隨後厥父嚴禁 惡友亂謗 承薰猶忍耐奉敎 先王愛其才 庚戌秋補蔭仕 官至平澤縣令 申亥被拿背敎 屢著毁敎文字 皆非本心也 乙卯聞司鐸東臨 動心回頭 豫備沾恩 不多日窘難起 承薰仍復畏縮 而以 初傳書之故 惡黨之攻斥聖敎也 必歸罪於承薰 先王每曲護之 承薰外雖從俗 或逢舊時密友 則 眷不能忘情 常思有以振起之 至是被禍 而此人有傳書之罪 雖復背敎 難免死刑 故不知其善死與否 徐當査實耳 李家煥自在幼少 才智超群 及長 風度魁偉 文章冠一國 無書不覽 强記如神

又精天文幾何之學 嘗歎曰 老夫死則東國幾何種子絶矣 少信理氣之學 每膽天黙歎曰 這樣大排布 何謂無主宰者 三十餘 登進士及第 先王器重之 甲乙之際 聞李蘗等信從聖敎 責之曰 我亦見西洋書數卷 (本家有職方外記西學凡等) 不過是奇文僻書 只可廣吾識見 安足以安身立命 李蘗據理答之 家煥辭屈 遂求書細覽 李蘗與初函書數種 時有聖年廣益一部 而恐家煥不信 蹟 不肯借看 家煥力爭之 盡取其時所有聖敎書 潛心反覆 決意而信之曰 眞理也 正道也 苟非實事 書中所說 皆誣天耳 慢天耳 西士必不得涉海傳敎 當遭雷震死矣 遂勸化門生 密與李蘗等 晨夕往來 頗有熱心 時李承薰等 妄行聖事 家煥勸人領洗 自己不肯 其意欲奉使入燕 受洗於西士也 未幾見時勢艱難 遂廢工課 而奉敎得謗者 多係家煥之姻親族屬 故惡黨常指斥爲敎主 辛亥窘難時 爲廣州府尹 頗害敎中 爲自明計 用治盜律於敎友 自家煥始 辛亥後 先王頗用南人 家煥乘勢 屢歷名宦 升拜工曹判書 乙卯三人致命後 惡黨不知司鐸之事 歸罪於李承薰及家煥 交章迭攻 先王不得已 謫承薰于禮山 左遷家煥爲忠州牧使 忠州有一敎友  謗素著 家煥治以嚴刑 逼令背敎 用周紐(治盜極刑)於敎友 亦自家煥始 又納官妓爲妾 皆所以掉脫 謗也 然自後枳廢 不復進用 居家以文章自娛 其妻素有信根 勸化女婦妾婢 或書冊綻露 家煥不爲査禁 戊午己未之間 聞外鄕窘難迭起 密謂其所信曰 此事譬如以杖擊灰 愈擊愈起 主上雖欲禁止 終當無奈何矣 初入禁府 猶自抵賴 治獄者 皆平時仇嫉之人 必欲致之死地 自知終不得免 遂承認本心 到死不  畢命於毒杖烙刑之下 時年六十歲 六人致命前數日也 權哲身亦杖斃 而不知其善惡死 容俟採訪 崔伯多祿必悌 字子順 多黙之從弟也 家貧親老 賣藥爲生 價廉而材精 人皆信之 眞實忠厚之表 粹然見於顔面 望而知其賢人也 多黙志氣高邁 而常敬憚之 雖係少年之弟 事皆諮之而後行 不敢自專 多黙有一親弟 毁斥聖敎 歷 敎友 而惟伯多祿則不敢譏  常稱天主敎中 惟子順一人 餘無可取 神父嘗歎美之曰 夫婦守貞者 鮮克有終 而子順夫婦 志操愈固 苦工愈勤 眞賢人也 被捕之後 其父本係外敎 驚憂成疾 臨終信主受洗而死 伯多祿在獄聞訃 訴官請暇 官命歸葬 更以言語 示其微意 欲令逃避 伯多祿不肯從 葬後 限入獄 竟以斬首致命 年三十二歲 嘗與數友 各言其志曰 斬首致命 乃吾至願 竟如其言 或傳伯多祿不勝杖 背敎 而官猶不放 伯多祿復說明受死云 頗未的實 姑以存疑耳 金若撤法健淳 老論大家之  家在京畿道驪州 先祖尙憲 有大功於國家 故世襲冠冕 爲國內甲族 若撤法生而穎異 九歲便有學仙之志 幼時受論語於塾師 至敬鬼神而遠之之章 問曰 當敬則不當遠 當遠則不當敬 而敬而遠之何也 其師不能答 其家素有畸人十篇 若撤法喜看之 十餘歲 著天堂地獄論 以明其必有 稍長博通文學 經史子集 醫經地誌 以至佛老兵家之書 莫不精熱 十八遭養父喪 東國喪服 遵用宋儒之制 頗失古法 若撤法 而正之 俗儒駭訝 貽書責之 若撤法作書答之 引據該洽 文辭霑  李家煥見而歎曰 吾不敢望也 居家忠信篤敬 德著鄕里 家本富饒 而傾財喜施 自己衣食 泊如貧者 名譽藉甚 每遊都下 軒馬輻輳 皆以一見爲奇 與李瑪爾定等五六人 結生死之交 將欲乘舟泛海 達于江浙 以至北京 面晤西師 多學利用厚生之方 歸傳于本國 因進敎不果 此五六人 皆爲主致命 時奉敎者 率皆南人 老論則未有一人 若撤法歆慕縱深 無門可入 偶因鄕間敎友 得見總領天神像 誤以爲聖敎與奇門相通 遂與姜彛天等 從事奇門 姜彛天者 少北名士 而心術不端 以爲本國必不長久 將有風雲之會 學習此術 以圖乘時進取 若撤法不知而誤交之 神父聞其賢 以書勸之 若撤法驚動悅服 盡棄從前所學 全心歸主 時年二十二歲 同時密友 莫不歸化 而惟姜彛天不肯全信 不數月 彛天本事綻露 遂起獄事 辭連若撤法 先王素知其才 曲爲之保護 獲免于禍 領洗後 熱心熾然 遂爲父兄所知 嚴加禁止 三四年內 家窘無時無之  謗從之而盛 若撤法表樣端正 謙 如愚下無知者 以此人愈敬服 被捕之緣由 臨難之操持 未能詳知 但聞臨刑謂市人曰 世間爵位聲名 都市虛假 我亦薄有名稱 亦能仕宦 而爲其虛假 棄而不取 惟此天主聖敎 至眞至實 故爲此死而不辭  等須仔細 終以斬首致命 時年二十六歲 都民莫不嗟惜 金伯淳 王都人 健淳之族兄也 家本貧寒 志切功名 先祖尙容 官爲國相 崇德丙子 大淸兵陷江都 尙容義不屈 自焚死 因此建祠旌閭 本國建大報壇於闕內 祭祀前明萬曆崇禎兩皇帝 每年國王率丙子死節人子孫 行展拜禮 禮罷設科 試與祭人 謂之忠良科 伯淳獨不與祭曰 尊周之誠 不在與祭 今日與祭者 專爲希 科名 事甚不誠 吾不爲也 初年隨人毁謗聖敎 亦爲擧子業 見世途危險 無心進取 讀宋儒書 窮究性理 又見道理疑晦 不可全信 遂讀老莊之書 因而悟人死有不滅者存  爲新論 講說於朋 之間 友等 之曰 此人議論新奇 必從西敎矣 伯淳聞而疑之曰 我得超人之見 而人以爲西敎 則西敎必有妙理 遂與敎友相從 數年辨論 確然信服 嚴守規誠 其母亦熱心歸化 但其妻本來强悍 常望丈夫之顯達 一朝絶望 不勝 恨  辱備至 兼之族黨親友 咸加毁罵 伯淳少不撓動 其母舅自來誘說 終不能得 乃曰 汝不聽吾言 當與汝絶交 伯淳曰 寧與舅氏絶交 不能與吾主絶交 於是友人莫不貽書告絶 宗族僉議別族 而伯淳晏如也 常曰 我自認主以來 心界不動如山 與健淳同日被斬 年三十二歲 奉敎不久 故未受洗 無聖名 李喜英路加 若撤法之密友 先居驪州 後移都下 本來工畵 善摹聖像 亦以斬首致命 洪斐理伯弼周 葛隆巴之前室子也 性本良善 隨母進敎 未能勤謹 陪奉神師之後 一年之間 判作異人 人皆驚異 在家常爲輔祭 被捕入獄 官問神父之事 治以毒刑 斐理伯忍受不招 竟至斬決 年二十八歲 姜葛隆巴 一名家女子也 才辨剛勇 志趣高尙 少小閨閤之中 已有作聖之想 而不明門路 隨人念佛 十餘歲 知識稍開 見其 誕難信 不復從事 長爲德山洪芝榮繼室 丈夫庸下不稱意 尋常鬱  恒存離塵絶俗之願 湖中聖敎初開 葛隆巴聞天主敎三字 自忖曰 天主者 天地之主也 敎名旣正 道理必眞 求書一見 傾心信服 其聰明勤敏 熱心克己 卓乎難及 勸化全家 旁及隣里 但芝榮全無主見 其妻勸之 則諾諾而從 惡黨毁之 則唯唯而信 其妻責之 則泣涕悔罪 惡友又來 則卽復如前 葛隆巴盡力無  知其不可與同事 辛亥之窘 本鄕擾亂 遂付田庄於丈夫  子女而上京 池撤巴之行 多所參贊 乙卯領洗 神父一見甚喜之 定爲會長 付以料理女友之任 五月之難 首倡 避之計 獨自周旋 藏神父于本家 盡力防護 以致捕差到門空還 難後神父定居其家 六年之內 敎中要務 咸厥贊助 神父寵任甚隆 無人可擬 葛隆巴內奉神父 起居服食 咸稱其宜 外理敎務 經營酬應 未嘗少懈 多聚童女 訓誨成就 分行各家 勸人信主 自己亦周巡勸化 夜以繼晝 鮮有安眠之時 而道理貫通 言辭辨給 化人 多 處事剛斷有威 人皆畏憚 被捕到官 官問神父 跡 周紐六次 不動聲氣 兩旁惡役曰 此神耳 非人也 終以斬首致命 年四十一歲 先王有庶兄一人 其子謀逆而死 先王放之江島 擧國請誅 而先王不許 其妻及子婦 留在舊宮 辛亥壬子之間 有一女敎友 憐而勸化 人皆以爲 禍機在此 不欲交通 而葛隆巴進之 旣領聖事 又入明會 知其事者 莫不憂悶 至是發覺 賜藥自盡 江島罪人 未嘗奉敎 而因連坐 幷賜藥殺之 兩婦人姓與聖名未詳 崔伯多祿以下 諸人致命日子幷未詳 趙伯多祿 楊根人也 其父鰥居窮因 力農資生 而伯多祿年近三十 不冠不娶 疲 孱弱 外貌無足可觀 更兼昏於俗事 人皆嘲笑之 不數之 遊學於丁奧斯定之門 奧斯定獨稱其大熱心 庚申四月 與其父偕往 驪州李瑪爾定村 瑪爾定被捕時 父子同參 到官不屈 官怒曰 汝不從命 當搏殺汝父 取其父 當面毒打 伯多祿不得已 說出背敎言語 蒙放出門 瑪爾定等提醒勸勉 伯多祿回心悔罪 復入官說明 官大怒 嚴囚不放 每經刑訊 他人或受例杖 惟伯多祿最多最酷 盖本官見其爲人 心甚輕之 以爲如此人 容易受降 而不意反甚堅固 故憎恨特深 必欲殺之 在獄十一朔 嘉言善行甚多 忘不能細述 後當査實 獄中受代洗 辛酉二月 官復嚴刑拷訊 迫令背敎 答曰 天無二主 人無二心 一死之外 無辭可告 官復命下獄 數日後絶命於獄中 時二月十四日也 李類斯以湖中傳敎之罪 斬於公州 而此人尙在背敎中 未知臨死之如何 或傳其善死 而未敢遽信 定山及禮山 各有致命者一人云 而亦不知爲誰某 全羅道辛亥以後 十年無窘 敎友頗多 四月初 全州柳奧斯定 高山尹方濟各等 二百餘人被捕 惟金堤貧士 姓韓的 及全州常人姓崔 字汝謙者 兩人剛毅 斬首致命 餘皆被屈 京鄕背敎人 皆竄流遠方 厥數甚多 而柳奧斯定兄弟 及尹方濟各 以領袖之故 不卽定配 移囚上京 金多黙被捕時 自說往來之事 因此亦移囚上京 尙未知或死或竄 外敎傳言 正刑及獄中致斃者 合三百餘人 外鄕不與焉 朝鮮開國後 殺人之數 未有甚於今歲 未知其信否 又未知浪死者爲誰 致命者幾人 朝廷之必欲盡殺者 地位高 能文字之人 愚鹵賤人 或知而故遺 或治而不嚴 都下常人 頗有存者 二月望前事 皆罪人親見者 頗爲詳悉 以後事 但憑傳說得聞 故甚爲 致命人事蹟 傳聞的實者 及平昔稔知者  爲記述 而不過梗 而已 其餘不敢妄錄 然其中尙恐有未實者 更當詳査 本神父自乙卯後 常住葛隆巴家 間或巡歷別所 而獨葛隆巴知之 他無與知者 及窘難起 有一男敎友 見事勢危急 恐難保全 徑往外鄕 尋見隱居之敎友 預備兩處妥當之所 再上京 見葛隆巴 懇請一謁神父 欲爲保護 避之計 葛隆巴曰 已得安身之所 不必更爲遷動 此友屢請不得 沒奈何空還 五六日後 禍機越大 此友恐波及 家遠避 丁奧斯定到官不招 官又捕葛隆巴母子 嚴刑鞠問 亦皆抵死不招 官取其婢子 周紐詰問 婢子不耐刑 從實直招 幷告年甲相貌 官謂葛隆巴曰 爾婢已招 爾不得終諱 須告此人所往處 答曰 此人先時果在我家 離去已久 今不知其處矣 於是出榜懸賞 摹寫容貌 遍求於外鄕 三月中神父自首 (未知往於誰家因何自首 幷未詳自首日字) 直入禁府衙門 吏卒驚問何人 答曰 我亦奉主敎之人 今聞朝廷嚴禁 多殺不辜 生旣無益 故自來求死 擁入官前 知係神父 遂下獄拘囚 只鎖兩足 不可刑訊 在獄之時 文字問答甚多云 而皆不得見 但聞外敎傳言 自首者 自稱西洋人 先此六人之死 論以逆律 神父自現之後 都民相傳 西士在獄 辨明天主敎人之非逆賊 又傳 西士不肯就死 盡說自己所欲言者 然後方請受死 此等傳說以不虛矣 四月望後 朝廷命御營大將 行軍門梟示 (死罪次刑) 大將稱病 三日不出 三日後 遞罷病官 出新官行刑

將出獄 如加刑問一次 (杖膝, 三十度)  過市曹 遍願觀者 稱渴索酒 軍卒捧上一盃 飮之盡 遂赴城南十里演武場 (江上沙場地名露梁) 貫矢於耳 軍卒授罪案使之看 所書頗多 而從容看畢 引頸受刑 時四月十九 天主聖三占禮日申時也 斬訖 忽然大風驟起 黑雲漫空 雷電轟燁 都民莫不驚惶 時一敎友在三百里外行路 一敎友在四百里外避難 見風雷異常 意者此日必有怪事 牢記日字 後聞神父致命 正此日此時也 懸首五日 晝夜防守 不許人近傍 隨後大將命 之 依舊嚴守 敎友潛識葬處 以圖日後遷  有惡官奏曰 此人不當  請命暴露 大妃允之 先時命 之大將諫曰 旣已 之 何必乃爾 事得已 而守墓軍卒 厭其苦守 潛移別處 敎友們暗地遍尋 至今不得 行刑時 宣言曰 此濟州人也 盖不奏聞中朝 所以掩跡也 神父致命後 窘難大勢稍減 而譏捕未嘗斷絶 獄中拘囚者尙多 或言當斬者 復有九人 傳聞之言 未知虛實 本神父到東之初 便有告 者 已爲先王所知 故七年之中 無時不小心畏約 未敢廣行聖事 沾恩者本不多 而太半是女友 外鄕敎友 乃都下常人 熱心者不少 受恩者絶稀 此輩皆忍受多苦 積年殷望 時勢不便 故雖私室之中 不敢開口說神父二字 不意反爲惡人所害 承顔於懸首之後 十載苦誠 一朝歸虛 神形至 亡之境 生死無可依之所 莫不喪情失志 不知所爲 罪人等雖安慰之曰 父師之來 專爲救人 豈不欲博施廣濟 奈緣阻碍之多端 忍愛莫發 今旣致命 在天主保之力 必大勝於在世時 吾 之托賴  等之盼望 正該加倍於前日 不可有絲毫失望之志 伊等將信將疑 且悲且慰 如此光景 恐是振古所無 太西昔年之窘 其慘毒 則有甚於今日此土 然神司相繼 聖事不絶 故聖敎不爲淪亡 生 盡行拯濟 東土則時勢逈異 萬無此望 綿羊失牧 猶能茁長 乳兒喪母 尙冀生全 罪人等則百爾思之 實無主路矣 罪人等生於終古幽暗之區 幸爲天主之人 常思 竭心力 顯揚主名 以報特恩之萬一 那知中道 遽遭此境 曾聞致命之血 爲斯敎之種 然 邦不幸 東隣日本 島夷殘毒 自絶於主 而我朝議論 反以爲能 將欲效之 寧不寒心 我東人品柔弱 法令解弛 未必如日本之刻酷 然現今敎中 高明剛毅之人 存者無幾 愚鹵賤人 婦女孩童 約 計之 尙不下數千 而料理無人 興起無方 似此形勢 其何能長久乎 不出十年 雖更無官窘 將自歸消亡 嗚呼痛矣 未死之前 何忍見聖敎之絶減乎 罪人等之今年免禍 感 交切 感慈恩之曲庇 特荷生全  罪惡之偏多 未蒙簡選 誠欲以此餘生 爲主盡  而不但智乏 又復力窮 其將舍寃而入地 抱恨而終天乎 哀痛悶迫之中 誰爲憐我 誰爲慰我 雖欲哭訴於大爺慈座之前 關河阻隔 膽望靡及 尤增煩鬱 將如之何 罪人等聞神父自現之消息 驚痛之外 又有所大惶 者 如或奏聞中朝 必然累及本堂 似此則東國敎務 無復如望 爲此夙宵憂慮 更深於本國之事 幸而庇佑 祿 根本不動 兼之罪人不死 若望無故 主旨昭然 如以東方之事 屬之於大爺也 罪人等何敢不訴盡哀曲 仰承此恩耶 請悉言之 願曲察之 萬國之中 東國 貧 東國之中 敎友尤貧 僅免飢寒者 不過十餘人 甲寅做事時 接待凡節都 不能先期預備 司鐸到東之後 方 拮据 以致每事窘束 此雖生疎未經事所致 實係貧寒力不逮而然 近年進敎者稍多 財力少勝於前矣 然未辦當行之事 引接未妥之人 至使禍難如此其酷 則太半由於財難矣 今年窘難之後 被難○○者 全家蕩盡 圖生者 隻身逃命 貧因之形 反甚於甲寅以前 縱有計策 無路施行 今雖破殘之餘 苟有財物 尙可有爲 論敎友 則未曾顯著之中 猶有若干可用者 可以枚合矣 論時勢 則乙卯以後 年年多難者 盖有二故 一則因先王之疑 司鐸 必欲搜覓也 一則因老論之忌嫉南人 力圖抗陷也 今也 先王之所疑者已破 老論之所嫉者已盡 敎中之表著者皆死 過了今年 可以寢息矣 論地方 則都城雖有五家統之法 敎友所居之里 則統法頗嚴 敎友不居之處 則作統有名無實 人皆晏如可以着脚矣 論經路 則畿忠全三道 素多敎友 慶尙江原兩道 近年避難者或居之 故廉探之官差 遍行於此五道 黃海平安兩道 本無奉敎者 亦無流入者 聲聞寂然 俗人不以爲疑 邊門雖有譏察 一二年來 絶無可疑之人 則漸當疎緩 可以容手矣 論經綸 則從前之人 皆以廣揚爲務 今焉已矣 當以保存爲務 深溝固壘 謹嚴自守 成就已進敎者 訓誨未長成者 虔祈主佑 靜待機會 則可保無虞矣 甲寅之事 敎友們歡幸之極 嚴愼未至 誤了初頭一着 馴致無奈何之境 前車旣覆 殷鑑不逮 今誠加謹加愼 不自破綻 則患難無由而起矣

目下事勢如此 未必坐而待死 然此皆有財而後可論也 不料一方聖敎之存亡  命之生死 懸於惡瑪滿矣 只緣無財 至於敎亡而 死 則寃恨當復如何 玆敢冒昧陳請 伏望爲之乞哀於太西諸國 以爲東方扶持聖敎 救濟生 之資本 則當密密經營 妥當預備 然後續請再生之恩 願大爺矜憫而垂憐焉 固知此請之煩瀆猥濫 然黙而不求 求而不得 等是永死耳 求而不得 則死無遺恨 故敢此發口 罪人等形神赤光 全全仰托 願大爺上 慈善之恩主 下念貧窘之弱息 慰滿我之盼望 成就我之志願 則聖敎幸甚 生 幸甚 罪人等 蒙不棄之恩 復許再生之路 當竭力以應承之 然不可以日月期也 經營周旋 少不下三數歲 而越境之行 難者有二 一則頭髮 一則口舌 頭髮易長 口舌難變 若言語便利 無甚危難 罪人之意 欲以本國一人 預先入堂 敎年少相公們以東國言語 以備後日之用 極爲妥當 未審鈞意若何 如蒙允許 則彼此打箇暗號 約束丁當 以冬門爲期 冬門不便 更以春門爲期 可望其順成 而又有極便者 中國敎友熱心謹愼者一人 移家於柵門之內 務極嚴愼 不出聲聞 開了店鋪 接待行人 則往來通信之際 甚不費力 其中妙處 不可勝言 此是東國生命關頭 而爲之不甚難 如有矜念東國 如本神父者 必然樂從 伏望博詢于熱心愼密者 以圖必成如何 本國方在危疑乖亂之際 無論某事 皇上有命 必不敢不從 乘此之時 敎宗致書皇上曰 吾欲傳敎朝鮮 而聞其國 屬在中朝 不通外國 故以此相請 願階下 勅該國 使之容接西士 當敎之以忠敬之道 盡忠於皇朝 以報階下之德 如是懇請 則皇上素知西士之忠謹 可望其允從 是所謂挾天子以令諸侯 聖敎可以安行 未審中國時勢 可行此計否 願留意焉 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而親卑之 繼又以授聖事者予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今年此罰 固知罪人等 辜負之攸致 然主之仁慈 猶未全棄 似此殘破之中 特留一線之路 明係肯救東國之表  主佑旣如此 若中西諸國事主之人 合心全力而圖之 豈不能化殃爲吉 救活此手掌之地耶 罪人等以此自慰而慰人 忍死延生 願大爺承行主旨 速施申救 伏聞近年中國 西賊猖獗 官軍屢敗 疆土日蹙 皇帝必有憂悶之心 有能言善謀 皇帝素親信者 乘此進言曰 安不忘危 存不忘亡 長久之道也 本朝起自東土 奄有海內 垂二百年于今矣 天下大勢 飜覆靡常 後世脫有不幸 當以寧古塔爲歸 而土地偏隘 不足以有爲 朝鮮之於寧古塔 只隔一水 烟火相望 呼應相聞 而地方三千餘里 東南則土地肥饒 西北則士馬精强 山連千里 材木不可勝用 海環三面 魚鹽用之不竭 慶尙道之人蔘至賤 耽羅島之良馬極多 此亦天府之國 而李氏微弱 不絶如縷 女君臨朝 强臣弄權 政事乖亂 民情嗟怨 誠以此時命爲內服 混其衣服 通其出入 屬之於寧古塔 以廣皇家根本之地 開撫按司於安州平壤之間 命親王監護其國 厚樹恩德 固結人心 天下有  割據遼瀋以東 保其巖阻 生聚敎訓 乘 而動 則此固萬世之基也 又聞其國王年少 未及聚妃 若取一宗室女 名爲公主 嫁爲國后 則今王爲駙馬 後王爲外孫 自當盡忠於皇朝 亦足以牽制蒙古 失今不圖 一朝他人堀起 據而有之 國治兵强 則非徒不能爲我用 恐反爲 腋之患 時至不行 後悔莫追 願皇上斷而行之 (以此大意遷就其說務期合於中朝時勢) 萬一皇上聽從 則聖敎之人 於中取事 庶可望其漸次大行 至於莫 之勢矣 中國敎友旣多 門路亦廣 豈無進言之蹊逕耶 側聞年前宣 之英學士 爲皇上椒房之親 亦與大爺相好 其家丁有敎友云 或可以 緣行計耶 若有如此人 力主此論 則可期皇上之聽納矣 雖然不可無端而命爲內服 必有一兩件罪過 然後可以籍口而行計 本國有許多不公不法之事 而不敢盡說 惟私造時憲書 及私造常平通寶 此二事 卽中朝之素知 而不問者 一經案  足以聲罪 此計固有益於皇家 亦無害於本國 現今國勢危  決難久支 若爲內服 則奸臣之  自息 李氏之聲勢倍勝 奚但聖敎之安 亦是國家之福 請勿以爲迂 而 採納焉 去年諭帖 獲承數年後差送大舶之命 今也則時勢已變 待然而來 則難望有成 此有一策 可使朝鮮人 奈何不得 束手從命 而但行之頗難 雖然請細陳之 本國兵力 本來孱弱 爲萬國 末 而 今昇平二百年 民不知兵 上無長君 下無良臣 脫有不幸 土崩瓦解 可立而待也  得海舶數百  精兵五六萬 多載大砲等利害之兵器 兼帶能文解事之中士三四人 直抵海濱 致書國王曰 吾等卽西洋傳敎舶也 非爲子女玉帛而來 受命于敎宗 要救此一方生  貴國肯容一介傳敎之士 則吾無多求 必不放一丸一矢 必不動一塵一草 永結和好 鼓舞而去  不納天主之使 則當奉行主罰 死不旋踵 王欲納一人 而免全國之罰乎 抑欲喪全國 而不納一人乎 王請擇之 天主聖敎 以忠孝慈愛爲工務 通國欽崇 則實王國無疆之福 吾無利焉 王請勿疑 更將太西諸國 欽崇眞主 久安長治之效 及東洋各邦容接西士 有益無害之事 反覆曉諭 則必然全國震駭 不敢不從 舶數人數 能如所說則大善 若力不及則數十 五六千人 亦可用矣 數年前 大西洋商舶一隻 漂到我國東萊 有一敎友 登舟細見 回言卽此一隻 足敵我國戰船百 云 東人之毒害聖敎 非人性之酷虐也 實有二故 一則由黨論甚盛 籍此爲 陷之資也 一則由聞見孤陋 所知者惟宋耳 少有不同之行 則看作天地間大 怪

譬如窮鄕少孩 生長室中 不見外人 偶逢生面之客 則必大駭而啼 今日光景 正猶是也 其實多疑多  愚蒙柔弱 天下無雙 是故神父自首之後  敎衆之興亂 許久不敢行刑 的知敎友們之無能爲 然後乃敢大着 戮殺之 然疑 之心 尙未解釋 乘此驚疑未定 臨之以必破之勢 震動其心 諭之以必無虞之里 開導其愚 則納與不納之間 利害較然 畏威懷安 必不敢拒絶 此計雖難 行之則必然萬全 如有可爲之勢 極力圖之幸甚 幸甚 或言如此擧動 無論行之之難易 恐不合於聖敎表樣 罪人則曰 不然 本國十年以來 致命者甚多 至於聖敎之司鐸 國家之重臣 亦皆束手就死 惡輩雖勅加以逆賊之名 實不得絲毫不忠之  良善之表 已孚於人心矣 若本國 敎友 鼓 爲難 則實是壞表樣 太西則乃聖敎根本之地 二千年來 傳敎萬國 莫不歸化 而獨此彈丸東土 不但不卽順命 反來梗化 殘害聖敎 戮殺神司 爲此東洋二百年來所無之事 興師問罪 有何不可 據耶蘇聖訓 則不容傳敎之罪 更重於索多瑪惡本辣矣 雖殄滅此邦 亦無害於聖敎之表 此不過大張聲勢 以納傳敎而已 人民無所害 財物無所取 則又仁義之極 而卓異之表也 何患表樣之不美 但恐力不及此耳 或又曰 如此則恐奏聞中朝 貽害本堂 罪人曰此則容易 書中說敎宗曾命神父某 傳敎貴國 貴國不惟不容 反行戮殺 今又不納傳敎 則吾當馳一介之使 布告貴國之罪於中朝 以明我等吊民伐罪之意 本國恐露私殺中士之罪 見責於中朝 必不敢奏聞 此又不足慮也 柵內開 事 爲當今最要緊急先務 逾速成 逾大幸 其他計策 亦當 數三年內施行 然後可望有成 過了此時 則又不知世 之如何 罪人等度日如年 自行無力 盼望甚殷 切願 哀憐而速救焉 今年窘難知名之敎友 鮮有免者 餘存者 當屛氣潛伏 以示滅絶之樣 然後聖敎可以保全 而敎友們 或托跡商賈 或避地遷徙 在路者頗多 每當齋日 易致綻露 敢此仰請 凡今日東國敎友行路者 無論大小齋  行寬免 以爲韜晦保存之地如何 有一人 上次告解時 許願一主日內 守兩日大齋 限後次告解矣 窘難後 此人棄家 避 流落山鄕 山間 飮食菲薄 再者 客中事勢非便 不得已不能守 而恐有許願 天主降生後一千八百一年 西滿達 瞻禮後一日 罪人多黙等再拜謹具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본주교 대야 (湯士選 구베아) 각하께 호소합니다. 지난 봄에 길 떠났던 사람 편에 각하께서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마는, 세월이 지나 벌써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은 또 어떻게 지내셨는 지 궁금합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각하께서는 주님의 넓으신 은총으로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덕화가 나날이 융성하시기에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뻐하여 하례 드리는 마음 이기지 못할 듯 합니다.


저희 죄인들은 죄와 악이 깊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노여움을 샀으며,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서 아래로는 다른 사람의 헤아림을 잃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그 화가 신부에게 (주문모) 미치게 하였습니다. 저희 죄인들은 또한 위태로움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스승과 함께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무슨 면목으로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겠습니까? 다만 엎드려 생각건대 성교가 뒤집혀 엎어질 위험이 있고, 백성이 박해에 걸려 죽을 고통 속에 있는데도 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어 붙들고 호소할 데도 없으며, 어진 형제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모든 것을 헤아려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은혜로운 부모를 겸하셨고, 의리로는 사목의 무거운 책임을 지셨으니, 반드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극한 괴로움에 저희는 장차 누구를 불러야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박해의 전말을 대략 아뢰고자 합니다. 일이 시작된지 이미 오래고 실마리가 하도 많아서 간단히 말씀드리기가 어려우므로 다음에 자세히 적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오직 죄인만이 요행히 화를 면했고, 요한도 들키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우리나라에서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죽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버려 성교를 증명하였거니와,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주가 미약하고 힘이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몰래 두서넛 교우와 당면한 일을 깊이 생각하여 저희 복안을 조목조목 나누어 아룁니다. 읽어보시고 의지할 곳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빨리 저희를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괴로운 심정이 뼈에 사무쳐,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주님의 전능하심과 각하의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으로 기구해 주시고 연민의 정을 크게 베푸시어, 저희들을 이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편안한 자리 위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성교가 이미 천하에 두루 전파되어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성덕을 노래하고 하느님의 교화에 북을 치며 춤추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左海] 백성들은 돌아보건대, 어느 누가 주님의 자녀가 아닌 이가 있겠습니까마는, 지역이 멀고 후미져서 가장 늦게 성교를 들었고, 기질이 잔약하여 괴로움을 견디기가 매우 어려워 십 년 풍파에 늘 눈물과 근심 가운데 있었는데 금년의 잔혹한 박해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이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가엾습니다.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번 교난이 있은 후에 아직 특별한 은총이 없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이 장차 이 나라에서 아주 끊어져 버리려 합니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간장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중국과 서양의 교우 선배들이 이 위태롭고 괴로운 사정을 들으면, 어찌 불쌍히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바라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각국에 널리 알리시고, 진실로 저희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은 모두 강구하시어, 우리 주님의 넓은 사랑의 은총을 본받아, 성교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모든 이를 두루 사랑하시는 뜻을 드러내어, 저희의 이 간절히 바라는 정성에 보답케 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목을 늘이고 발돋움하여 오직 기쁜 소식이 있기만 기다립니다. 우리 주교 각하께서는 부디 글로써 다 아뢰지 못하는 저희들을 가련히 여겨 주십시오.


을묘년 주문모 신부를 체포코자 하다 놓쳐 버린 후부터 선왕의 의심과 두려워함이 날로 더하여, 잠시도 멈추지 않고 철저하게 기찰을 하였으나 아직 신부에 관해서 조그마한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끝내 신부의 종적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화진이라는 자를 시켜, 거짓으로 성교를 믿는다 핑계하고 호중(충청도의 별명)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여 마침내 기미년 겨울 청주의 박해가 일어나 충청도의 열성적인 교우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최필공 토마스 형제는 중인으로, 성품이 곧고 의지가 굳세며, 의로움에 의지해서 재물을 멀리하며, 성교에 대한 열성이 지극하여 일반 사람과 다른 뛰어난 풍모가 있는데 불행히 신해년의 박해 때 잡혀서 유혹에 빠져 성교를 배반하였습니다. 선왕은 몹시 기뻐서 그를 장가들게 하고 벼슬을 주니, 토마스는 하는 수 없이 순종하여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근년에 와서는 집에 들어앉아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통감하며 항상 몸을 바쳐 보속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기미년 8월에 선왕이 갑자기 형조로 불러들여, “네가 아직도 사학을 신봉하고 있느냐?”하고 물었습니다. 토마스는 이 때야말로 자기가 바라던 대로 성교를 위해 죽을 때라고 여기고, 마침내 성교의 충효의 이치와 자기가 뼈아프게 뉘우치고 있는 심정을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빛나고 위엄이 있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을 모두 감동시켰습니다. 그러자 형관은 몹시 놀라고 성이 나서 그대로 임금께 아뢰었는데, 선왕은 다시 더 형벌을 가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이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려 토마스를 사형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역시 모호한 대답을 내려서, 자못 그를 포용하는 뜻을 보였기에, 일은 그 정도에서 가라앉았습니다. 이중배 마르띠노 소론의 일명으로, 경기도 여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용맹과 힘이 월등히 뛰어나고 의지와 기개가 호쾌하였습니다. 전부터 김건순과 생사를 같이할 만큼 친하게 사귀어 왔는데, 건순이 교를 믿어 받들게 되자 마르띠노 역시 믿고 순종하여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는 불꽃같은 열성으로 믿으며, 눈을 바로 뜨고 대담하게 행동하여,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경신년 부활절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가지고, 한 동리 교우들과 함께 길가(산골 작은 길)에 모여 앉아서 큰소리로 희락경을 (희락삼종 : 부활삼종기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고, 이렇게 해가 다 저물도록 계속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원수처럼 지내는 가문의 고발로 그는 교우 열한 사람과 함께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 중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도 있었지마는, 모두 마르띠노의 격려하고 권면하는 힘에 의지하여, 여러 번 지독한 형벌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이 굳게 버티어, 결국은 석방되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마르띠노는 본래 의술을 조금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깊지는 못했는데, 옥에 갇힌 후에 혹 와서 병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기구하고, 그런 다음에 침을 놓고 약을 쓰게 하여,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서 멀고 가까운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옥문 앞이 저자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그 고을 군수는 이것을 막지 않았고, 자기도 병이 있어 와서 약을 물으니, 이로 인해 옥중에서도 날마다 쓰는 것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김건순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들이 혹 마르띠노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칭찬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열에 여덟 아홉은 고친다고 대답하지마는, 실상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 사람도 효험을 보지 못하는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옥리가 의서를 좀 보자고 하였으나 그가 대답하기를 “내게는 의술을 적은 책이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오. 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마땅히 주님을 믿으시오”하였습니다. 그러자 옥리가 다시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어찌 배울 수 있단 말이오?"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마르띠노가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없어지지 않는 책으로 족히 남들을 가르쳐서 교를 받들게 할 수 있소”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함께 갇혀 있는 원요한에게 한 늙은 여종이 있었는데, 늘 옥에 와서 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집안 사정을 늘어놓고는 성교를 그만 두라고 거듭 말하며 꾀었으나 요한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여종의 말이 하도 간절하여 요한이 집안을 걱정하는 기색이 나타나므로 마르띠노는 그 늙은 여종을 노려보았습니다. 늙은 여종은 두려워 감히 말을 마치지 못하고 물러가, 그 뒤에는 다시 옥에 가지 않고 “이 생원님의 눈빛이 무서워서 다시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마르띠노는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며, 진리를 해설하여 남들에게 교를 믿으라고 권하였는데, 옥졸 한 사람은 마음이 움직여 성교를 믿고 따라서 열성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철신은 남인(곧 東人) 대가의 후손으로, 경기도 양근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경학과 예학으로 세상에서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는데, 성교가 우리나라에 이르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본래가 이름 있는 집안인 만큼, 성교를 믿자 남들의 비난도 역시 심하였습니다.


그의 아우 일신이 신해박해 때에 죽자, 그 뒤부터는 감히 드러내놓고 신앙을 지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더 심해 갔습니다. 기미년 여름, 그의 고향의 귀신같이 고약한 무리들이 사실과 어긋나는 일을 꾸며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이에 권씨 집안의 자제들도 맞서 일이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조정하고 정당하게 해석한 덕택에, 간악한 모함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간교한 계획은 더욱 비밀히 진행되어, 서울에 있는 간악한 무리와 결탁하여 경신년 5월에 직접 선왕을 뵙고 아뢰기를 “양근 온 고을에 사학이 극성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이 없습니다.


그러나 군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금도 사찰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그 군수를 징계하고 문책해야 합니다.”하였습니다. 선왕은 그들의 말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양근 군수는 책망을 받고 스스로 사퇴하였습니다. 새 군수는 부임하자마자 묵은 사건을 다시 일으키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철신은 나이가 많고 체포 후의 일을 두려워하여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 아들이 여러 차례 아버지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청하였으나, 군수는 허락하지 않고 기어코 철신을 불러들이려고 하여, 사건이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왕이 성교에 대하여 비록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마는, 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확대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또한 신부의 [鐸德] 일은 두 나라 사이에 관련되는지라, 만의 하나라도 일이 드러나 알려지게 되면 그 처리가 매우 난감하므로, 을묘년 이래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중히 금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체를 담당 관리에게 맡기고는 그러려니 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방의 박해는 은밀한 명령에 의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부러 모르는 체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여 신부를 잡아 암암리에 결말을 지어 버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 계획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김여삼이라는 사람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형제 셋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피하려고 서울로 이사하였는데 근년에 와서 여삼은 냉담하여 성교를 배반하고 무뢰배들과 함께 몰려다녀, 그의 두 형도 이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이안정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역시 충청도 사람으로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이 좀 있었고, 여삼과는 사돈간이었습니다. 여삼은 집이 가난하여 늘 보태주기를 원했습니다만, 이안정이 그의 뜻대로 다 들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여삼은 한을 품고 항상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안정이 늘 성사를 받고 있었는데, 여삼은 이를 눈치채고 망령된 생각을 하기를, ‘만약 신부가 다른 사람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라고 권하면 그는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안정에게 권하지 않았으므로 안정은 여삼에게 재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삼의 노여움은 신부에게로 옮겨져서 신부를 모략하고 해칠 마음을 먹고 끝내는 신부님의 일을 포도부장에게 밀고하였습니다. 포도부장의 무리들은 5, 6년 동안이나 몰래 살펴보아도 끝내 알아내지 못하던 판에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그들은 “일이 성공하면 마땅히 너를 재물이 넉넉한 관직에 추천하겠다”고 하고,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캐어물었습니다. 이 때 신부는 골롬바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여삼은 이것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포도부장과 약속하기를, “아무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면 내 알려 주겠소”하였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날이 채 안되어 여삼이 마침 다른 사람의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약속한 날에 포도부장이 그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헛수고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한 교우가 이 일을 알고 신부에게 알려,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했고, 이안정에게 돈 수십 관을 마련해 가지고 찾아가서 여삼과 화해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삼의 원한과 분노가 잠시 누그러졌고, 며칠이 못되어 국왕이 세상을 떠나니, 각 관청에서는 일이 많아 사건이 더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삼은 이미 밀고를 한 뒤여서 또한 자기 스스로는 그만둘 수도 없었으므로, 늘 못된 무리들과 함께 용의주도하게 서로 의논하여 기어코 해치려고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2백년 전부터 당파가 생겨서 서로 대립하였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북의 네 당파가 있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다시 나뉘어 두 파가 되었습니다.


그 한편은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등 몇몇인데 모두 전에는 주님을 믿었으나 구차하게 목숨을 아까워하여 성교를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성교를 해쳤지마는 마음속에는 아직도 신앙을 위해 죽을 생각이 있었는데, 그 당파의 사람은 수가 아주 적어서 세력이 몹시 외롭고 위태로웠습니다.


또 한편은 홍의호, 목만중 등 진심으로 성교를 해치는 사람들인데, 십 년이래 양편은 서로 깊이 원한을 맺었습니다. 노론도 역시 두 파로 나뉘었는데 시파라는 것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심복의 신하가 되었고, 벽파라는 것은 당론을 고수하는데 힘써 임금의 뜻에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처럼 되었으나, 당의 형세가 매우 커서 선왕도 이를 두려워하였고, 근년에는 온 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가환은 문장이 세상에서 출중하였고, 정약용은 재주와 기지가 뛰어났으므로 을묘년(1795) 이전에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 활동 사실이 발각되기 이전) 선왕이 그들을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을묘년 이후로는 차차 소외당해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벽파가 몹시 꺼려하여 끝끝내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이가환 등은 성교를 배반하고 성교를 해쳤는데도, 벽파의 여러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사당으로 지목하고 배척하여 온갖 참소와 공박을 다하였지마는, 선왕이 매번 그들을 감싸주었으므로, 벽파가 마음대로 해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왕이 돌아가시자 대를 이은 임금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대왕대비는 곧 선왕의 계조모로서 본래 벽파 출신으로, 친정은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를 당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대왕대비는 여러 해 원한을 품고 있었지마는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마침내 벽파를 끼고 거리낌없이 학정을 폈습니다. 경신년(1800) 11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어, 조정 안을 절반 정도나 비게 하였습니다.


전부터 성교를 해쳐오던 못된 무리들이 벽파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시세가 크게 변동되는 것을 보자 요란스럽게 들고일어나서, 크게 일을 저지를 형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경신년(1800) 4월에 명도회에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주문모 신부에 의해 세워진 평신도들의 교리연구 및 전교단체) 가입한 후로 여러 교우들이 신공에 부지런히 힘썼고, 회원 아닌 사람들도 역시 자진해 움직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기에 힘썼으므로,


그 해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무럭무럭 감화되어 나날이 불어났는데, 그 중 부녀자가 3분의 2요, 무식한 천민이 3분의 1이었습니다. 사대부 집 남자는 세상의 화를 두려워하여 믿고 따르는 사람이 극히 적었습니다.


을묘년(1795) 박해 때 골롬바는, 신부를 보호한 큰 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에, 신부는 전적으로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고, 골롬바 역시 열성으로 일을 처리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벼슬아치 집안의 부녀자로서 입교하는 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대개 우리나라의 법이, 역적만 아니면 사대부의 집안 부녀자에게까지는 형벌이 미치지 않으므로 이로 인해 그들은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도 역시 그 점을 빌어서 성교를 널리 전할 바탕을 삼고자 하여 그들을 특별히 후하게 대접하시니, 교회 안의 대세가 모두 부녀 교우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성교의 소문도 그에 따라 또한 널리 퍼졌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의 큰 정사가 되었으므로 새 임금이 (純祖) 즉위한 후 반드시 제일 먼저 어떤 처분이 있을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처분이 어떠한 것일지는 알 수가 없어서, 신부는 더욱더 삼가고 조심하였고, 교우들은 모두 속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12월 17일에 형조에서는 포졸을 내보내어 최필공 토마스를 체포해다가 가두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의 송사가 아직 미결로 있었으므로, 이번에 그가 체포당한 것은 뜻밖의 일은 아니고, 또한 그 때는 단속하여 금하기로 되어 있었을 뿐으로 조정에서는 아직 엄중한 금령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비록 경계는 하였지마는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움이 심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19일 성헌당첨례일 (주의 봉헌 축일) 새벽에 최토마스의 종제 최베드로가 (崔必悌 伯多祿 1769~1801 순교자) 한길 가에 있는 약방 안쪽 방에서 몇몇 교우들과 함께 경문을 외고 있었습니다.


창문 밖에 마침 투전을 단속하고 다니는 한 관리가 있다가, 창문 안에서 가슴 치는 소리를 듣고 투전의 장단 치는 소리로 알고 창문을 열고 뛰어들었는데 투전이 보이지 않자 한 사람 한 사람 몸을 수색해서 첨례단 (교회 축일표) 한 장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글자를 알지 못해서 무엇인지 모르므로, 글을 아는 관리에게로 가지고 가서 보였습니다. 그것이 성교에 있는 글임을 안 그들은 교우들을 잡으려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았는데, 다른 교우들은 벌써 다 달아나 흩어졌고, 오직 베드로와 오스테파노 두 사람만 남아 있다가 잡혀서 관가로 들어가 토마스와 같이 수감되었습니다.


이에 포도부장의 무리들은 김여삼과 장안의 무뢰한들을 앞장 세워서, 안 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부릅뜨고 찾아 교중이 온통 물 끓듯 요란해졌는데, 마침 세밑이 되어 일이 잠시 잠잠해졌었습니다.


정월 초아흐레 (1801. 1.9) 총회장 최창현 요한이 (崔昌顯 1754~1801 순교자) 체포 당하고부터 부장들은 밤낮 없이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여기 저기서 잡아가, 체포된 사람이 양청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무식하고 새로 입교한 사람과 여염집 부녀자들이었고, 의지가 강하고 굳센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11일 대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성교를 엄금하였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습니다.

Posted by 잡동산이(雜同散異)
:
(앞면)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乇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뒷면)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并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가만히 생각하건데,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根機(근기)에 따라 感應(감응)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舍利(사리)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五色으로 빛나는 舍利를 7번 요잡(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佐平(좌평) 沙(宅)積德(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善因(선인)을 심어 今生(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棟梁(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淨財(정재)를 희사하여 伽藍(가람)을 세우시고, 己亥年(기해년) 정월 29일에 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善根(선근)을 資糧(자량)으로 하여 大王陛下(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蒼生(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王后(왕후)의 身心(신심)은 水鏡(수경)과 같아서 法界(법계)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不滅(불명)하시어 七世의 久遠(구원)까지도 함께 福利(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Posted by 잡동산이(雜同散異)
:
曩日 伊藤侯가 韓國에 來ᄒᆞᆷᄋᆡ 愚我人民이 逐逐相謂曰 侯ᄂᆞᆫ 平日東洋三國의 鼎足安寧을 自擔周旋ᄒᆞ던 人이라 今日 來韓ᄒᆞᆷ이 必也我國獨立을 鞏固히 扶植할 方略을 勵告ᄒᆞ리라 ᄒᆞ야 自港至京에 官民上下가 歡迎ᄒᆞᆷ을 不勝ᄒᆞ얏더니 天下事가 難測者ㅣ 多ᄒᆞ도다 千萬夢外에 五條件이 何로 自ᄒᆞ야 提出ᄒᆞ얏ᄂᆞᆫ고 此條件은 非旦我韓이라 東洋三國의 分裂ᄒᆞᄂᆞᆫ 兆漸을 釀出ᄒᆞᆷ인즉 伊藤侯의 原初主意가 何에 在ᄒᆞᆫ고

雖然이나 我大皇帝陛下의 强硬ᄒᆞ신 聖意로 拒絶ᄒᆞᆷ을 不己ᄒᆞ셧스니 該約의 不成立ᄒᆞᆷ은 想像컨ᄃᆡ 伊藤侯의 自知自破ᄒᆞᆯ 바어ᄂᆞᆯ 噫 彼豚犬不若ᄒᆞᆫ 所謂 我政府大臣者가 營利를 希覬ᄒᆞ고 假嚇를 恇刧ᄒᆞ야 逡巡然觳觫然 賣國의 賊을 甘作ᄒᆞ야四千年 疆土와 五百年 宗社를 他人에게 奉獻ᄒᆞ고 二千萬 生靈으로 他人의 奴隸를 敺作ᄒᆞ니 彼等 豚犬不若ᄒᆞᆫ 外大 朴齊純及 各大臣은 足히 深責ᄒᆞᆯ 것이 無ᄒᆞ거니와 名爲參政 大臣者ᄂᆞᆫ 政府의 首揆라 但以否字로 塞責ᄒᆞ야 要名의 資를 圖ᄒᆞ얏던가 金淸陰의 裂書哭도 不能ᄒᆞ고 鄭桐溪의 刃剚腹도 不能ᄒᆞ고 偃然生 存ᄒᆞ야 世上에 更立ᄒᆞ니 何面目으로 强硬ᄒᆞ신皇上陛下ᄅᆞᆯ更對ᄒᆞ며 何面目으로 二千萬同胞ᄅᆞᆯ 更對ᄒᆞ리오嗚乎痛矣며 嗚乎憤矣라 我二千萬爲人奴隸之同胞여 生乎아 死乎아 檀箕以來四千年 國民精神이 一夜之間에 猝然滅兦而止乎아 痛哉痛哉라 同胞아 同胞아 

지난번 이토 히로부미(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 일이 예측하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도 다섯 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뜻이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았음은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자신의 출세와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거리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백성들을 남의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저 개 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으나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Posted by 잡동산이(雜同散異)
:

후출사표(後出師表)

모으다 2011. 11. 16. 16:15 |

先帝慮漢、賊不兩立,王業不偏安,故託臣以討賊也。以先帝之明,量臣之才,故知臣伐賊,才弱敵強也。然不伐賊,王業亦亡,惟坐而待亡,孰與伐之?是故託臣而弗疑也。

臣受命之日,寢不安席,食不甘味;思惟北征,宜先入南:故五月渡瀘,深入不毛,并日而食。臣非不自惜也:顧王業不可偏安於蜀都,故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也。而議者謂為非計。今賊適疲於西,又務於東,兵法“乘勞”:此進趨之時也。謹陳其事如左:

高帝明並日月,謀臣淵深,然涉險被創,危然後安。今陛下未及高帝,謀臣不如良、平,而欲以長策取勝,坐定天下:此臣之未解一也。

劉繇、王朗各據州郡,論安言計,動引聖人,群疑滿腹,眾難塞胸;今歲不戰,明年不征,使孫策坐大,遂并江東:此臣之未解二也。

曹操智計,殊絕於人,其用兵也,髣彿孫、吳,然困於南陽,險於烏巢,危於祁連,偪於黎陽,幾敗北山,殆死潼關,然後偽定一時耳;況臣才弱,而欲以不危而定之:此臣之未解三也。

曹操五攻昌霸不下,四越巢湖不成,任用李服而李服圖之,委夏侯而夏侯敗亡,先帝每稱操為能,猶有此失;況臣駑下,何能必勝?此臣之未解四也。

自臣到漢中,中間期年耳,然喪趙雲、陽群、馬玉、閻芝、丁立、白壽、劉郃、鄧銅等,及曲長屯將七十餘人,突將無前,賨、叟、青羌,散騎、武騎一千餘人,此皆數十年之內,所糾合四方之精銳,非一州之所有;若復數年,則損三分之二也。當何以圖敵?此臣之未解五也。

今民窮兵疲,而事不可息;事不可息,則住與行,勞費正等;而不及今圖之,欲以一州之地,與賊持久:此臣之未解六也。

夫難平者,事也。昔先帝敗軍於楚,當此時,曹操拊手,謂天下已定。然後先帝東連吳、越,西取巴、蜀,舉兵北征,夏侯授首:此操之失計而漢事將成也。然後吳更違盟,關羽毀敗,秭歸蹉跌,曹丕稱帝。

凡事如是,難可逆見。臣鞠躬盡力,死而後已;至於成敗利鈍,非臣之明所能逆睹也。


선황제 폐하(유비) 께옵서는 한나라와 위나라 역적은 양립할 수 없으며, 황업은 천하의 한귀통이로만 안주할 수 없다 하시어 신에게 역적의 토벌을 당부하셨나이다. 선황제께서 그 밝으심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니 역적을 벌함에 신의 재주가 얕고 역적은 강함을 아셨사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아니한다면 황업 또한 망할 터이니,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린다면 누구와 더불어 역적을 징벌하오리까. 이 때문에 신에게 탁고하시고 의심하지 않으신 것이옵니다. 신은 선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이래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사옵니다. 북쪽을 칠 생각을 하니 우선 남방부터 평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의 양식으로 이틀을 먹는 고생을 한 것은 신이 몸을 아끼지 않음이 아니라, 황업을 생각하오니 촉 땅에서 편안히 지내서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어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선황제의 유지를 받든 것이옵니다. 그런데 따지기 좋아하는 무리들은 이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하나이다. 이제 역적은 마침내 서쪽에서 고달파지고, 다시 동쪽에서 오나라의 군사들과 싸워 지쳐 있사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피로할 때를 타 공격하라 하였으니, 지금이 바로 과감하게 나아갈 때라 사료되옵니다. 이에 신은 삼가 몇가지를 아뢰옵나이다.

옛날에 고황제 폐하(유방)께옵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고 신하들의 재주가 연못처럼 깊었으나 험난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입으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해지셨사옵니다. 이제 폐하(유선)께옵서는 고황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신료들 또한 감히 장량과 진평같은 자가 없는데도,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좋은 계책으로만 승리하여 가만히 앉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수 없는 첫 번째 일이옵니다.

또한 유요와 왕랑은 각각 주와 군을 다스리며 안위와 계책을 말하면 입만 열면 성인을 운운하고 벗속에는 의심이 가득하여 여러 어려움 앞에서는 겁내고 두려워 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올해도 싸우지 않고 다음해에도 싸우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손책이 앉아서 강동을 차지하였으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일이옵니다.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 그 용병술은 손자와 오자를 닮았으나 남양에서 어려움에 처하고 오소에서 험한 일을 겪고 기련에서 위태로움에 처했으며 여양에서 핍박을 당하고 북산에서 거의 패배하고 동관에서는 죽을 뻔한 뒤에야 비로소 한때나마 거짓으로 천하를 평정했는데도 재주도 미약한 신하들이 어찌 위태로움을 겪지 아니하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일이옵니다.

조조는 다섯번이나 창패를 치고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였고 네번이나 소호를 건넜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복을 등용하였으나 오히려 배반당하고 하후연에게 일을 맡겼으나 하후연이 패망하였사옵니다. 선황제 폐하께서 항상 뛰어난 인물이라고 칭찬하신 조조조차도 이렇게 실패하곤 하였는데 하물며 신같은 아둔한 사람이 어찌 쉽게 이기기만 바라겠나이까.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네 번째 일이옵니다.

신이 한중에 온지 이제 1년 남짓 되었사오나, 그 동안 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 등 70여명의 곡장과 둔장을 잃어 선봉장으로 앞장설 사람이 없사오며 종수, 청강, 산기, 무기 등 1천여 명을 일었사오니 이는 모두 수십년 동안 사방에서 모아온 정예병이지 익주 한 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만약 또다시 몇해를 보내면 셋 중 둘을 잃게 될 터이니 그때는 무엇으로 역적을 도모하겠사옵니까.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섯 번째 일이옵니다.

바야흐로 백성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사오나 대사를 그만둘 수 없사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지키고 있는 것이나 나아가서 싸우는 것이나 그 노고와 비용은 같은데도 속히 도모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 주에만 머물러 역적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사오니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섯 번째 일이옵니다.

무릇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천하의 일인지라, 옛날 선황제 폐하께옵서 초 땅에서 패하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천하는 평정되었다고 좋아했사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황제께옵서는 동쪽의 오월과 손을 잡으시고, 서쪽으로는 파촉을 취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쳐서 하후연의 목을 베셨사옵니다. 이는 바로 조조의 실수로 한나라의 대업이 이루어지려 하였사오나 동오가 맹약을 어겨 관우를 죽이고 선황제께옵서는 자귀에서 패하시오니 조비가 황제를 참칭했사옵니다. 이렇듯 일은 미리 헤아리기가 어렵사옵니다. 이제 신은 엎드려 몸을 바치고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할 뿐이오니, 일의 성패와 이해에 대하여서는 신이 미리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Posted by 잡동산이(雜同散異)
:

조의제문(弔義帝文)

모으다 2011. 11. 15. 21:35 |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楚懷王孫心
爲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愕然曰
懷王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
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
遂爲文以弔之
惟天賦物則以予人兮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而今亡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
昔祖龍之弄牙角兮
四海之波
殷爲衁
雖鱣鮪鰍鯢
曷自保兮
思網漏而營營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氓
梁也南國之將種兮
踵魚狐而起事
求得王而從民望兮
存熊繹於不祀
握乾符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芉氏
遣長者而入關兮
亦有足覩其仁義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胡不收而膏齊斧
嗚呼(오호)
勢有大不然者兮
吾於王而益懼
爲醢腊於反噬兮
果天運之蹠盭
郴之山磝以觸天兮
景晻愛以向晏
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
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
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정축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숙박하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인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그래서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이르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으로
지역간 서로 떨어진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만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또한 천 년이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것을 알 수 없으니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와 오상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오랑캐라서 인색한 바 아니니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오랑캐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옛날 조룡이 아각을 가지고 노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어라
비록 전유와 추애일지라도
어찌 보전하겠는가
그물 벗을 생각에 급급했으니
당시 육국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과 짝이 되었다오.
항량(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어호(魚狐)를 쪼치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도다.
건부(乾符)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었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았다.
양흔낭탐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평정하였구나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오호라!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나는 왕에게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천지가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할까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자양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옵컨데 영령은 와서 제사음식을 받으소서.

Posted by 잡동산이(雜同散異)
: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e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서 자유 속에 잉태되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봉헌된 한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고 우리 선조들 이 세운 나라가, 아니 그렇게 잉태되고 그렇게 봉헌된 어떤 나라가, 과연 이 지상에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자리는 남군과 북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그 싸움터의 땅 한 뙈기를 헌납하고자 여기 왔습니다. 우리의 이 행위는 너무도 마땅하고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이 땅을 봉헌하고 축성하며 신성하게 하는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여기 목숨바쳐 싸웠던 그 용감한 사람들, 전사자 혹은 생존자들이, 이미 이곳을 신성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기 더 보태고 뺄 것이 없습니다. 세계는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그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서 수행한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싸워서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그러나 미완으로 남긴 일을 수행하는 데 헌납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다 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 명예롭게 죽어간 이들로부터 더 큰 헌신의 힘을 얻어 그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지키고자 한 대의에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그들이 헛되이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 굳게 다짐합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1863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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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잡동산이(雜同散異)
:

1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 인류) 共存同生權(공존 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 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2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유사이래) 累千年(누천 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지 今(금)에 十年(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 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奇緣(기연)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3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소잔)을 興奮伸張(흥분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급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하고, 人類通性(인류통성)과 時代良心(시대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4

丙子修好條規(병자 수호 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서, 我(아) 祖宗世業(조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犖(탁락)한 民族心理(민족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辯(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縻(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광정)하야, 自然(자연),又(우) 合理(합리)한 政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한 兩國倂合(양국병합)의 結果(결과)가,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과 統計數字上(통계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심조)하는 今來實積(금래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하는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동양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야금 正當(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야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하는 不安(불안),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평화), 人類幸福(인류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5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 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6

吾等(오등)이 玆(자)에 奪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群象(만휘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백세) 祖靈(조령)이 吾等(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 着手(착수)가 곳 成功(성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공약 3장)

一.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 生存(생존), 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一.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一.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조선) 建國(건국) 四千二百五十二年(사천이백오십이년) 三月(삼월) 一 日(일일) 朝鮮民族代表(조선 민족 대표)

孫秉熙(손병희) 吉善宙(길선주) 李弼柱(이필주) 白龍城(백용성)  金完圭(김완규) 金秉祚(김병조) 金昌俊(김창준) 權東鎭(권동진) 權秉悳(권병덕)  羅龍煥(나용환) 羅仁協(나인협) 梁旬伯(양순백) 梁漢默(양한묵) 劉如大(유여대)  李甲成(이갑성) 李明龍(이명룡) 李昇薰(이승훈) 李鍾勳(이종훈) 李鍾一(이종일)  林禮煥(임예환) 朴準承(박준승) 朴熙道(박희도) 朴東完(박동완) 申洪植(신홍식)  申錫九(신석구) 吳世昌(오세창) 吳華英(오화영) 鄭春洙(정춘수) 崔聖模(최성모)  崔 麟(최 린) 韓龍雲(한용운) 洪秉箕(홍병기) 洪其兆(홍기조)

우리는 오늘 우리 한국이 독립국이며 한국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합니다.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진리를 환하게 밝히며, 이를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의 자립과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이를 선언하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아 이를 두루 밝히며, 영원한 민족의 자유와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하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하니, 이는 하늘의 명백한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로이기에 세상의 어떤 힘도 이를 막거나 억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의 희생이 되어 유사 이래 수천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고통을 당한 지 이미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광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슬픈 일입니다.

오랜 억울함을 떨치고 일어나려면, 현재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땅에 떨어진 민족의 양심과 국가의 체면과 도리를 떨쳐 얻으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겨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바로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천만 겨레마다 마음속에 칼을 품은 듯 굳게 결심하니, 인류 공통의 성품과 이 시대의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주의라는 창과 방패로 호위하고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싸우니 어느 강도를 꺾지 못하겠습니까!

물러가 일을 꾀하니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겠습니까!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배신을 죄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학자들은 강단에서, 통치배들은 실생활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대대로 닦아 온 찬란한 위업을 식민지로 삼아 문화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여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무도함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습니다.

현재를 꼼꼼이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것뿐이지,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 남을 시샘하여 쫓아내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배들의 부귀공명의 희생이 되어 압제와 수탈에 빠진 이 비참한 상태를 바르게 고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공정하고 인간다운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침략, 강정이이었으므로 그 결과는 마침내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실정을 보십시오!

용감하고 현명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과거의 잘못을 뜯어 고치고, 참된 이해와 선린을 바탕으로 우호적인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서로 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지름길인 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원한과 분노에 쌓인 이천만 민족을 폭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오직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시기가 갈수록 두터워진 결과,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이 될 것이 분명하니, 오늘 우리 한국의 독립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의 선진후원국으로서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악몽처럼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동양의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수적인 받침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겠습니까!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무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과거 한 세기 동안 갈고 닦으며 키우고 기른 인도주의 정신이 이제 막 새로운 문명의 밝은 빛을 온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통을 막아 꼼짝 못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키고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찬란히 꽃피우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떨쳐 일어났습니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분연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더불어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억만대의 조상님들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로운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호위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입니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입니다.

공약 삼장

하나.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맙시다.

하나.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흔쾌히 발표합시다.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가장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합시다.

조선 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 대표

손병의 김병조 나인협 이명룡 박준승 오세창 최린 길선주 김창준 양전백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한용운 이필주 권동진 양한묵 이종훈 박동완 정춘수 홍병기 백용성

권병덕 유여대 이종일 신혼식 최성모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이갑성 임예환 신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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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잡동산이(雜同散異)
:

전출사표(前出師表)

모으다 2011. 11. 12. 05:51 |
臣亮言: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若有作姦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侍中侍郞 郭攸之費褘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 以遺陛下。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 是以衆議擧寵爲督。愚以爲營中之事 悉以咨之 必能使行陳和睦 優劣得所。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侍中尙書長史參軍 此悉貞良死節之臣 願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閒 爾來二十有一年矣。先帝知臣謹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夙夜憂歎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興復漢室 還于舊都。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褘允之任也。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若無興德之言 則責攸之褘允等之慢 以彰其咎。陛下亦宜自謀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零 不知所言。

신 승상 무향후 제갈량은 아뢰옵니다.

선황제 폐하(유비)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오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하오나 폐하(유선)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안에서 나태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무사들이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대우해주시던 황은을 잊지 않고 오로지 폐하께 보답코자 하는 마음 때문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들의 충언에 귀를 크게 여시어 선황제의 유덕을 빛내시오며, 충의 지사들의 의기를 드넓게 일으켜 주시옵소서. 스스로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셔서 그릇된 비유를 들어 대의를 잃으셔서는 아니되오며, 충성스레 간하는 길을 막지 마시옵소서.

또한, 궁중과 부중이 일치 단결하여 잘한 일에 상을 주고 잘못된 일에 벌을 줌에 다름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옵니다. 만일 간악한 짓을 범하여 죄 지은 자와 충량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각 부서에 맡겨 상벌을 의논하시어 폐하의 공평함과 명명백백한 다스림을 더욱 빛나게 하시고, 사사로움에 치우치셔서 안팎으로 법을 달리하는 일이 없게 하시옵소서.

시중 곽유지와 비의, 시랑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하오며 뜻과 생각이 고르고 순박하여 선황제께서 발탁하시어 폐하께 남기셨사오니, 아둔한 신이 생각하건대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들에게 물어보신 이후에 시행하시면 필히 허술한 곳을 보완하는 데 크게 이로울 것이옵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에 밝은지라 지난날 선황제께서 상총을 시험삼아 쓰신 뒤 유능하다 말씀하시었고,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그를 도독으로 천거했사오니, 아둔한 신의 생각으로는 군중의 대소사는 상총에게 물어 결정하시면 반드시 군사들 사이에서 화목할 것이오며,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모두 적재적소에서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다할 것이옵니다.

전 한 황조가 흥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멀리했기 때문이오며, 후한 황조가 무너진 것은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 때문이오니, 선황제 폐하께서는 생전에 신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일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셨사옵니다. 시중과 상서, 장사와 참군 등은 모두 곧고 밝은 자들로 죽기로써 국가에 대한 절개를 지킬 신하들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들을 가까이 두시고 믿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머지않아 한실은 다시 융성할 것이옵니다.

신 은 본래 하찮은 포의로 남양의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황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번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하였사옵니다. 그후 한실의 국운이 기울어 싸움에 패하는 어려움 가운데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해온 지 어언 스무해 하고도 한해가 지났사옵니다.

선황제 폐하께옵서는 신이 삼가고 신중한 것을 아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탁고의 대사를 맡기셨사옵니다. 신은 선황제의 유지를 받은 이래 조석으로 근심하며 혹시나 그 부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여 선황제의 밝으신 뜻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끝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었사옵니다. 이제 남방은 평정되었고 인마와 병기와 갑옷 역시 넉넉하니, 마땅히 삼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나아가 중원을 평정시켜야 할 것이옵니다.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대한 황실을 다시 일으켜 옛 황도로 돌아가는 것만이 바로 선황제 폐하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드리는 신의 직분이옵니다. 손익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 드릴 일은 이제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몫이옵니다.

원컨대 폐하께옵서는 신에게 흉악무도한 역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킬 일을 명하시고, 만일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엄히 다스리시어 선황제 폐하의 영전에 고하시옵소서. 또한 한실을 바로 일으키는 데 충언이 올라오지 아니하거든 곽유지, 비의, 동윤의 허물을 책망하시어 그 태만함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옵소서. 폐하께옵서도 마땅히 스스로 헤아리시어 옳고 바른 방도를 취하시고, 신하들의 바른 말을 잘 살펴 들으시어 선황제 폐하께옵서 남기신 뜻을 좇으시옵소서.

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나이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을 올리여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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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잡동산이(雜同散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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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某言。古之列國。亦各置史官以記事。故孟子曰。晉之乘,楚之擣扤,魯之春秋。一也。惟此海東三國。歷年長久。宜其事實。著在方策。乃命老臣。俾之編 集。自顧缺爾。不知所爲。中謝。 伏惟聖上陛下。性唐堯之文思。體夏禹之勤儉。宵旰餘閒。博覽前古。以謂今之學士大夫。其於五經諸子之書。秦漢歷代之史。或有淹通而詳說之者。至於吾 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甚可歎也。况惟新羅氏高句麗氏百濟氏。開基鼎峙。能以禮通於中國。故范曄漢書,宋祁唐書。皆有列傳。而詳內略外。不以具 載。又其古記文字蕪拙。事迹闕亡。是以君后之善惡。臣子之忠邪。邦業之安危。人民之理亂。皆不得發露。以垂勸戒。宜得三長之才。克成一家之史。貽之 萬世。炳若日星。如臣者本匪長才。又無奧識。洎至遟暮。日益昏蒙。讀書雖勤。掩卷卽忘。操筆無力。臨紙難下。臣之學術蹇淺如此。而前言往事幽昧如彼。 是故疲精竭力。僅得成編。訖無可觀。祗自媿耳。伏望聖上陛下。諒狂簡之裁。赦妄作之罪。雖不足藏之名山。庶無使墁之醬瓿。區區妄意。天日照臨。

臣(신) 富軾(부식)은 사뢰오니, 古代(고대:중국)의 列國(열국)에서도 각기 史官(사관)을 두어 時事(시사)를 기록한 일이 있으므로, 孟子(맹자)는 가로되 "晉(진)의 乘(승), 楚(초)의 檮杌(도올), 魯(노)의 春秋(춘추)가 다 한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東方三國(동방삼국)에 있어서도 歷年(역년)이 오래되어 마땅히 그 사실을 書冊(서책)에 기록하여야 할 것이므로, 老臣(노신)을 명하여 이것을 編修(편수)케 하심인데, 스스로 돌아보건대 부족함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건대 聖上陛下(성상폐하)께옵서는 唐虞(당우)의 文思(문사)를 갖추시고 夏禹(하우)의 勤儉(근검)을 본받으시어 바쁘신 餘暇(여가)에 前代(전대)의 書史(서사)를 博覽(박람)하셔서 말씀하기를, 지금의 學士大夫(학사대부)가 五經(오경)·諸子(제자)의 書(서)라든지, 秦漢歷代(진한역대)의 史記(사기)에 대하여는 혹 널리 통하여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 나라의 事實(사실)에 이르러선 도리어 茫然(망연)하여 그 始末(시말)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된 일이다, 더구나 新羅(신라)·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의 三國(삼국)이 鼎立(정립)하여 능히 禮(예)로써 中國(중국)과 교통한 때문에 范曄(범엽)의 漢書(한서:후한서)라든지 宋祁(송기)의 唐書(당서)에다 그(三國(삼국)의) 列傳(열전)이 있지만, 그 史書(사서)는 자기 國內(국내)에 관한 것을 상세히 하고 外國(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실리지 아니하였고, 또 그(三國(삼국)의) 古記(고기)로 말하면 글이 거칠고 졸렬하고 事蹟(사적)의 遺漏(유루)가 많아, 이런 까닭에 임금의 선·악이라든지 臣子(신자)의 忠(충)·邪(사), 나라의 安(안)·危(위), 人民(인민)의 治(치)·亂(난)에 관한 것을 다 드러내어, 써 후세에 勸戒(권계)를 보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三長(삼장)의 才(재)를 얻어 一家(일가)의 역사를 완성하여 이를 萬世(만세)에 끼치어 日星(일성)과 같이 환하게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臣(신)과 같은 자는 본래 三長(삼장)의 才(재)도 없고 또 깊은 知識(지식)도 없으며 老年(노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날로 정신이 혼몽하여, 비록 讀書(독서)에 부지런히 하여도 책만 덮으면 곧 잊어버리며, 붓을 잡아도 힘이 없고 종이를 대하면 죽죽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臣(신)의 學術(학술)이 이와 같이 淺薄(천박)하고 前代(전대)의 事蹟(사적)이 저와 같이 아득합니다. 이러므로 한껏 精力(정력)을 다하여 겨우 卷冊(권책)을 이루었으나 결국 보잘것이 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라오니 聖上陛下(성상폐하)께옵서 이 疏漏(소루)한 編纂(편찬)을 양해하여 주시고 妄作(망작)의 罪(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것이 비록 名山(명산)에 秘藏(비장)할 거리는 되지 못하나 간장항아리 덮개와 같은 無用(무용)의 것으로는 돌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臣(신)의 구구한 妄意(망의)는 天日(천일)이 비추어 내려다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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